사서(四書)의 확립: 오경(五經)에서 사서로
사서의 확립: 오경(五經)에서 사서(四書)로

유학(儒學)은 중국 한(漢)나라 이후 유가(儒家) 경전이 정리되면서부터 『시경』·『서경』·『역경』·『예기』·『춘추』의 오경이 학문의 중심이었다. 한당(漢唐)시대까지만 해도 유학자들의 기본 교재는 오경이었다.
오경에 대한 주석 수는 이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그러나 글자의 해석에만 치중함으로써 경전의 참뜻이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였다.
불교와 도교의 시대를 거치면서 우주와 인간의 내면에 대한 복잡한 이론들이 나왔으나, 유학은 당시의 정신적인 관심과 요구에 만족할 만한 해답을 주지 못하였다.
이러한 학문 풍토의 시대적 요구에 따라 송대(宋代)에 이르면서 오경 대신 사서에 대한 엄밀한 주석 작업이 진행되었다.
사서(四書)는 『대학』·『중용』·『논어』·『맹자』를 가리킨다. 『논어』는 한나라 이후 육경(六經)의 하나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매우 중시되었다.
그러나 『맹자』는 한대에는 사람들에게 별로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당대(唐代)의 한유(韓愈)에 이르러 비로소 중시되었다.
『대학』과 『중용』은 『예기』 중의 한 편명이었다. 양무제(梁武帝)가 처음으로 그것들을 『예기』로부터 분리시켜 별도의 책으로 만들고 주석까지 붙였고,
당대에 한유(韓愈)와 이고(李翺)가 높이 평가한 이후에야 비로소 점차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이고(李翺)는 『중용』에 바탕을 두어 본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복성서(復性書)』를 저술하기도 했으며, 또한 범중엄(范仲淹)이 『중용』에 각별한 중요성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주희(朱熹)에 이르러서 『대학』·『중용』, 이 두 편은 『논어』·『맹자』와 대등한 지위에까지 올라가게 된다.
1190년에 주희는 『논어』·『맹자』·『대학』·『중용』 4권의 경서를 사자(四子)라는 이름으로 묶어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하였다.
이후 1313년부터 1912년까지 이들 4권의 경서는 중국의 관료선발 시험과 학교 교육에서 기본 교재가 된다.
주희는 거의 30년에 걸쳐 이들 4권의 경서와 관련된 저술 작업을 진행한다. 1168년 39세에 『논어집주』와 『맹자집주』를 저술한다. 또한 1189년 60세에는 『대학장구』와 『중용장구』를 완성한다.
그렇다면 주희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사서에 주목하였는가? 그의 학문체계를 구성하는 성리학의 핵심 이론들이 모두 사서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는 『대학』에서, 지행(知行)문제는 『논어』에서, 심성(心性)문제는 『맹자』에서, 미발이발(未發已發)문제는 『중용』에서 유래한다.
그는 사서에 실려있는 이러한 문제들을 새롭게 해석하여 그 자신의 성리학 이론에 그대로 반영함으로써 그 학문체계의 뼈대를 구성한다.
또한 주희는 사서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 방법도 제시하였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그는 "사람들은 먼저 『대학』을 읽어 그 규모를 정하고, 다음은 『논어』를 읽어 그 근본을 세우며, 다음은 『맹자』를 읽어 그 빼어난 면을 보고, 다음은 『중용』을 읽어 옛사람들의 미묘한 뜻을 구해야 한다."라고 하여,
『대학』→『논어』→『맹자』→『중용』의 순으로 사서를 읽어나갈 것을 권장한다. 사서의 공부 순서에서도 드러나듯이 주희의 성리학 이론체계는 『중용』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주희가 1190년에 『사서집주』를 저술한 이후부터는 사서의 지위가 오경의 세력을 능가하여 유학사상의 정통적인 권위를 지니게 된다.
이러한 사서의 지위 향상은 송대 신유학(新儒學)의 특색이며, 그 뒤 유학의 변화는 사서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존의 오경 위주의 해석에서 벗어나서 사서를 중심으로 하는 우주론·심성론·인식론·수양론 등 광범위한 이론체계로 집대성된다.
이것이 바로 성리학이 역사상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갖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