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순음(입술.ㅁㅂㅍ)과 후음(목구멍.ㅇㅎ)의 오행 분별
『훈민정음』은 오음(五音)을 오행에 각각 배정하면서 ① 발음기관의 성질 ② 발음되는 소리의 성질을 근거로 하였다.
먼저, 소리가 나는 자리(발음기관), 즉 목구멍(喉후)·어금니(牙아)·혀(舌설)·이(齒치)·입술(脣순) 자체의 성질이 각각 물·나무·불·쇠·흙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목구멍은 깊고 윤택하니 물, 어금니는 어긋나고 길어서 나무, 혀는 재빠르게 움직이므로 불, 이는 단단하고 자르니 쇠, 입술은 모나고 합해지니 흙이란 것이다.
다음으로, 발음되는 소리 그 자체가 다섯 물질의 성질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목구멍소리(ㅇㅎ)는 비고 통하니 이것은 물이 비고 밝고 흘러 통함과 같다. 어금닛소리(ㄱㅋ)는 목구멍소리와 비슷하나 가득 차 있으니 이것은 나무가 물[목구멍]에서 나서 형체가 있음과 같다. 혓소리(ㄴㄷㅌㄹ)는 구르고 날리니 이것은 불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것과 같다. 잇소리(ㅅㅈㅊ)는 부스러지고 걸리니 이것은 쇠가 부서져서 단련되는 것과 같다. 입술소리(ㅁㅂㅍ)는 머금고 넓으니 이것은 땅이 만물을 머금어서 넓고 큼과 같다.
목구멍소리(ㅇㅎ)는 유동적(流動的)이어서 물처럼 흐르는 듯하고, 어금닛소리(ㄱㅋ)는 단단하여 나무를 두들기는 듯한 소리로 들리고, 혓소리(ㄴㄷㅌㄹ)는 불꽃이 재빨리 움직이는 듯 느껴지고, 잇소리(ㅅㅈㅊ)는 쇠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입술소리(ㅁㅂㅍ)는 땅처럼 든든한 느낌을 준다. 훈민정음 창제자들은 자음 소리에서 이러한 인상을 받았고, 이러한 인상을 철학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 허웅, 『국어학―우리말의 오늘·어제』, 샘문화사, 1983, 310~313쪽.
이러한 오성(오행)의 특성에 오음의 성질을 각각 연결해보면, 궁성(토)-입술소리(ㅁㅂㅍ), 상성(금)-잇소리(ㅅㅈㅊ), 각성(목)-어금닛소리(ㄱㅋ), 치성(화)-혓소리(ㄴㄷㅌㄹ), 우성(수)-목구멍소리(ㅇㅎ)의 관계가 가장 적절함을 알 수 있다.
지금 훈민정음 순음과 후음의 오행 분류에 혼란이 생겨나게 된 발단인 『훈민정음운해』(1750년)의 저술자 신경준은 『훈민정음』 원본인 해례본을 참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훈민정음 제자 원리의 철학적 배경에 대해서는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못하였다.*
* 이성구, 『훈민정음연구』, 동문사, 1985, 26쪽.
최현배도 그의 저서 『고친 한글갈』(1976년)에서 신경준이 『훈민정음』 원본인 해례본을 보지 못하고 『훈민정음운해』를 저술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한글의 태극사상 기원설과 관련해서도 “(신경준은) 鄭(인지)서(序)만 보았을 뿐이요, 그 ‘훈민정음해례’는 보지 못하고, 다만 자기의 요량대로 태극설과 한글과의 관련을 붙여 본 것이다.”라고 하면서 신경준이 『훈민정음』 원본인 해례본을 보지 못한 채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고 지적하였다.*
* 최현배, 『고친 한글갈』, 정음문화사, 1982, 624~625쪽.
이처럼 국어학계에서는 이미 신경준이 원본인 『훈민정음해례』를 보지 못하고 불완전한 주장을 펼친 것이 지적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작명가들만이 그 잘못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명확한 논거도 없이 『훈민정음해례』의 오음·오행 분류에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것은 훈민정음 창제에 담긴 본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으로서 결코 정당하지 않다. 자신의 지식에 오류가 있으면 그 오류를 수정하는 것이 배우는 이들의 참된 모습이다.
입술소리 ‘ㅁ'을 소리 낼 때는 입술이 열렸다 닫히므로 이때의 입 모양을 본떠서 ‘ㅁ’자를 만들었다. 중국 한자의 ‘口’(입 구)자도 원래 입의 모양을 본뜬 것이므로 이 두 글자는 같게 만들어졌다. 또한 입술소리의 기본자 ‘ㅁ’은 땅(土)이 사방(四方)으로 펼쳐진 ‘지방(地方)’의 모습과도 닮았다. 이는 글자 모양 상으로도 ‘ㅁ’이 궁성인 토(土)음에 배정된 근거로 볼 수 있다.
훈민정음에서 ‘ㅇ’(이응)은 음가(音價)가 없는 글자이다. 가령 ‘아’는 모음 ‘ㅏ’의 소리만을 나타낼 뿐이지 실제 ‘ㅇ’의 음가는 없다. 그러나 소릿값이 없는 것을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무(無, zero)의 소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ㅇ’를 만든 것이다. 그리하여 음가가 없는 소리를 표기하는데 ‘ㅇ’을 활용했으니, 이것은 오늘날 수학의 ‘0’(영, zero)과도 통한다.
‘ㅇ’(이응)의 발명은 수학에서 영(0)의 발명만큼이나 획기적이며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선천 하도(河圖)에서 보면 만물은 오행상 수(水)로부터 비롯된다. 그래서 수(水)는 만물의 본원으로서 생수(生數)는 1이 되고 성수(成數)는 6이 된다. 『서경』 <홍범>편에서도 오행의 첫째는 수(水)이며, 수(水)는 적시며 내려가는 것(五行, 一曰水, 水曰潤下)이라고 하였다.
이것도 훈민정음 창제자들이 음가가 없는 목구멍소리 ‘ㅇ’(이응)을 만물의 근원이자 오행의 본원인 수(水)에 배정한 까닭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출처: 김만태, 「훈민정음의 제자원리와 역학사상: 음양오행론과 삼재론을 중심으로」, 『철학사상』 제45호,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