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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비결, 정초 신년 운수에 거는 희망과 기대
2023.12.14 19:43
작성자 : 김만태교수    메일 : ware4u@hanmail.net 조회 : 2,267  

인천광역시립박물관, 『박물관풍경』, 2023 겨울 제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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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비결, 정초 신년 운수에 거는 희망과 기대

김만태(전 동방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교수)


토정비결이 처음 등장하는 시기

“시작이 좋아야 끝이 좋다”는 속담처럼 누구나 처음 시작을 특히 중요시한다. 그러므로 1년의 계획을 새롭게 세우는 새해 첫날인 설날은 다른 날에 비해 매우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설날에는 늘 간절한 바람이 많이 따랐으며, 이로 인해 설날에는 점복과 관련되는 풍속이 많이 있다. 다양한 방법으로 괘를 만들고 이로써 길흉을 점치는 윷점․오행점․토정비결 등이 그 예이다.

그중에서도 토정비결이 가장 대표적인데 토정비결이 한국의 정초 세시풍속으로 자리 잡게 된 기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조선 중기 토정 이지함(1517~1578)이 저술한 것으로 통상 알려져 있는 토정비결에 관한 기록은 19세 초중반의 『경도잡지』, 『세시풍요』, 『동국세시기』 등에서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조선 후기까지의 다른 문헌들에서도 토정비결이 등장하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현재까지 토정비결이란 명칭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문헌은 『황성신문』 1899년 12월 19일자 논설로서, 『정감록』과 관련해 언급된다. 토정비결이란 명칭이 『황성신문』 1907년 5월 8일자와 『대한매일신보』 1908년 10월 1일자 논설에도 등장한다. 이 기사에서도 토정비결이 지금처럼 개인 신수를 풀어 보는 점술책이 아니라 『정감록』처럼 국가존망과 풍수도참에 관한 내용을 싣고 있는 비결서인 듯이 언급된다.

구한말 신문기사들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토정비결은 개인 신수를 보려는 지금의 토정비결이 아니라, 조선 왕조의 몰락을 예고하는 동시에 새로운 왕조의 등장을 예언하며 18세기 이후 줄곧 민간에 유포되며 한국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정감록』과 비슷한 종류의 국가 운수에 관한 풍수도참 비결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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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도참서에서 신수풀이 점술서로의 변화

당시 조선에는 『삼한산림비기』, 『도선비결』, 『정북창비결』, 『남사고비결』 등 다른 많은 비결들이 공공연히 민간에 유포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정감록』과 함께 토정비결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는 사실은 토정의 명성을 가짜로 빌린 비결이 그 당시 사회적으로 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윳과뎜책』(박문서관, 1918)에 ‘당년신슈길흉보는법’이란 제목으로 한글로 풀이된 토정비결이 활자본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토정비결은 그 연대가 확실한 가장 오래된 토정비결의 하나인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한문 필사본의 토정비결과 그 내용이 거의 같다. 다만 일반 사람들이 읽기 쉽도록 그 내용을 한글로 옮긴 것만 다를 뿐이다. 이를 미뤄볼 때 장서각 소장본 토정비결은 1918년 이전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여러 정황을 종합해볼 때, 개인의 한 해 신수를 풀어 보는 용도로서 지금의 토정비결은 조선의 국운이 최종적으로 기울어 가던 1910년 무렵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민간에는 이미 ‘토정비결’이란 통칭으로 국운에 관한 풍수도참 비결인 『토정가장결』, 『이토정비결』이 먼저 유포되고 있었다. 이즈음 어느 술수가가 ‘당년 신수 보는 법’에 관한 책을 지어 유포하면서 이지함과 기존 토정비결의 명성에 가탁한 것이 지금 전해져 오는 토정비결이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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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민을 몸소 실천한 이지함의 명성에 기대었다

1720년(숙종 46) 토정의 현손인 이정익(1655~1726)이 이지함의 글들을 묶어 간행한 『토정유고』에도 토정비결은 실려 있지 않다. 비록 토정비결이 이지함의 저술이 아닌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참고로 이지함의 행적에 대해 살펴볼 필요는 있다. 왜냐하면 도대체 어떤 점에서 토정비결과 이지함이 연관될 수 있었는지를 탐색할 필요성은 있기 때문이다.

이지함은 목은 이색의 6대손이고, 형은 지번(?~1575)이며, 지번의 두 아들 중 산해(1539~1609)는 영의정을, 산보(1539~1594)는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지함은 57세 때인 1573년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를 찾아 천거하는 인재 등용책으로 천거되어 만년에 포천현감과 아산현감을 지냈으며, 율곡 이이(1536~1584)와 교유하였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헌(1544~1592)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이지함은 천문에 밝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술법에도 능통하여 조카인 이산해가 해(亥)년에 태어나 장차 집안을 일으켜 세울 것도 예견하였다. 이지함의 행적은 『선조수정실록』에도 일부 기록되어 전하는데, 그는 기품이 신기하였고 성격이 탁월하여 어느 격식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이지함이 말년인 62세 때 아산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토정은 곤궁한 백성들의 생업을 영위하게 해주려고 직접 (보령) 바닷가에서 얼굴에 그을음을 잔뜩 묻히며 소금을 구웠다고 한다.

여러 문집과 실록의 기사를 볼 때 이지함의 언행은 결코 범상치 않았다. 그리고 곤궁에 처한 백성을 위해 궂은일도 마다않고 몸소 실천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정치적․사회적으로 불안한 시기 그의 이름에 가탁하여 민중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토정비결이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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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비결의 괘사, 은유적 표현에서 보다 단정적으로

토정비결은 그 해 신수를 보려는 사람의 생년월일을 가지고 각각 상․중․하괘를 계산하며, 이 세 괘를 합하여 자기의 토정비결 괘를 얻는 것이다. 누구나 이 144가지 괘 가운데 어느 한 괘에 해당된다. 수많은 사람들의 운세를 144가지로 규정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불합리해보일지 모르지만 조선 후기 당시의 정초 점복풍속이었던 윷점이 64괘, 오행점이 32괘를 갖고 있는 것에 비하면 한층 더 세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44가지가 되는 토정비결의 각 괘에는 1년 동안의 운수를 개괄적․은유적으로 예언한, 그래서 두루뭉술하고 애매하기도한 4언 절구의 글귀가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본(한문 필사본)과 『윳과뎜책』(1918)에 수록된 한글 활자본의 토정비결 둘 다에는 주역 괘가 전혀 표기되어있지 않으며 각 괘사가 4언 4구로만 간략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재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토정비결은 그 내용이 매우 복잡하다. 먼저 주역의 본괘․지괘가 표기되었으며, 괘사도 4언 44구(남산당 『원본토정비결』)내지 4언 41구(명문당 『원본토정비결』)가 더 추가되었다. 1964년 발행된 명문당 발행 토정비결이 주역 본괘·지괘에 관한 설명 외에 각 괘사가 총 4언 26구로만 구성되었던 것과 비교해 봐도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생활에 부응하여 토정비결의 괘사도 점차 추가되어 왔으며 복잡해졌음을 알 수 있다. 괘사의 내용도 보다 단정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토정비결과 『주역』를 연계시키는 경우도 많은데, 이것도 점서로서 『주역』의 권위에 의탁하여 토정비결의 가치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중간에 끼어진 것일 뿐 실제로는 『주역』과 직접 관련되지 않는다. 『윳과뎜책』에 수록된 토정비결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토정비결에서는 전혀 주역 괘와 연계시키고 있지 않은데, 이후 발행되는 토정비결 책들에서 주역 괘가 등장하는 것을 볼 때 토정비결과 『주역』과의 연결고리 작업은 후대에 이루어졌다고 추정된다.

『윳과뎜책』의 1918년 토정비결의 괘 풀이는 은유적·개괄적이어서 길흉의 뜻이 분명하지 않으며 두루뭉술하고 애매한 반면, 점차 점괘가 보다 세분화되고 괘사가 더욱 다양해지면서 농경사회의 특성뿐 아니라 19세기 후반 이후 급속히 변모해가던 당시 사회의 다양한 가치관들이 반영되었다.

토정비결 괘사에 나타나는 주요 특징으로 구설수, 관재수, 친구(사람)로부터 받는 피해, 출타하지 말라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이는 그간 한국사회가 겪어온 어두운 시대상과 인간 관계상을 반영한다고 하였다. 즉 인간관계와 사회에의 불신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의 폐쇄적인 생활을 반영한 점괘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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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비결에 대한 두 가지 평가

토정비결의 기원과 유래에 대한 뚜렷한 정설이 아직 없다보니 이에 대한 평가도 분분한데, 대략 두 가지로 그 내용을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우리 민중들의 숙명론적 인생관에 편승한 허무맹랑한 미신이자 점술서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인 실천 강령이나 도덕률을 모은 교육서라는 것이다. 대체로 전자는 토정비결을 위작으로 보는 측의 평가이며, 후자는 토정의 저술로 간주하는 측의 평가이다.

비록 그 전승력이 점차 약해지고는 있으나 근래 정초에 가장 일반화되었던 점복풍속이 바로 토정비결을 보는 일이다. 최근에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활자로 된 토정비결 책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제공되는 토정비결 사이트를 통해서 새해 신수를 보기가 성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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