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훈민정음해례>는 갑자기 사라졌는가?
한글 자음 입술소리(ㅁㅂㅍ)와 목구멍소리(ㅇㅎ) 잘못된 사용
1446년(세종 28년)에 1책 33장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던 원본 <훈민정음>인 <훈민정음해례> 책자가 갑자기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는 것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임금이 직접 지은 저술이 갑자기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훈민정음해례>가 갑자기 자취를 감춘 배경에는 연산군 때의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있다. 갑자사화는 1504년(연산군 10년)에 연산군이 어머니 윤씨의 폐비 사건과 관련된 신하들을 처형한 사건이다.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성종 때 폐위(廢位)되어 사약을 받고 죽은 일에 연관된 신하들과 윤씨의 복위(復位)를 반대한 사람들이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화(禍)를 입었다.
1504년 음력 3월 11일부터 연산군의 피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폐위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사람들은 모두 처벌을 받았는데, 궁중에서는 고문받는 이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았고, 이미 죽은 이들은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하였으며, 산 이들도 모두 벌을 받고 자결하거나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런 와중에 1504년 음력 7월 19일, 연산군의 처남이 되는 신수영(愼守英)에게 웬 사람이 찾아와, 자신이 이규(李逵)의 심부름꾼이라고 하면서 서찰 하나를 전해주었다.
신수영은 서찰을 연산군에게 은밀히 올렸는데, 연산군이 읽어보니 자신을 비방하는 언문 (한글) 투서였다. 내용은 몇몇 의녀(醫女)들이 모여서 “우리 임금이 신하들 죽이기를 파리 잡듯이 하고 여자를 밝히니 반드시 화가 있으리라.”라고 말했으니 벌하라는 것이었다.
연산군은 투서의 내용에 노하여 다음날(7월 20일) 도성의 문을 닫고 투서자를 추적하며 투서에 언급된 의녀들을 심문하였다. 그런데 막상 조사해보니 의녀들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며, 이규 또한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하였다. 누군가 자신을 감추고 이규와 의녀들의 이름을 팔아 연산군에게 욕을 한 것이다.
그러나 끝내 진범은 잡히지 않았으며 억울하게 고초를 겪은 사람만 늘어났다. 또한 같은 날에 한글 사용을 전면 금지하고 쓰거나 배우는 자는 무조건 체포하며, 이런 사람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같이 벌하라고 명령하였다. 그 외에도 일일이 한글 아는 자를 추려 투서와 필적을 비교하여 찾아내도록 하였다.
“앞으로는 언문을 가르치지도 말고 배우지도 말며, 이미 배운 자도 쓰지 못하게 하며, 모든 언문을 아는 자를 한성의 오부(五部)로 하여금 적발하여 고하게 하되,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자는 이웃 사람을 아울러 죄주라.”
― <연산군일기> 제54권, 연산 10년 (1504)년 7월 20일 투서의 일로 언문을 배우거나 쓰지 못하게 하다
연산군도 처음 분노했을 때는 한글을 모두 없애버릴 기세였지만 분노기가 조금 가라앉자 자기가 생각해도 아니다 싶었는지 명령을 내리고 이틀 만에(7월 22일) “언문을 쓰는 자를 벌하고 언문으로 구결을 단 책을 불사르되, 한문을 언문으로 번역한 책 따위는 내두라.”하고 한걸음 물러났다.
이후 연산군은 역서(曆書)·제문(祭文)·악장(樂章) 등을 한글로 번역하도록 지시하고, 한글을 아는 여성을 뽑아 관청에서 일하도록 하였다. 연산군의 한글 탄압은 일시적으로 그쳤다. 하지만 그 여파는 매우 컸다.
<훈민정음해례>가 사라진 사이 1750년(영조 26년)에 신경준(申景濬)이 지은 <훈민정음운해>가 등장한다. <훈민정음운해>는 토(土)인 입술소리(ㅁㅂㅍ)를 수(水)로, 수(水)인 목구멍소리(ㅇㅎ)를 토(土)로 잘못 전하였다.
이에 대한 학계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신경준은 <훈민정음> 원본인 해례본을 참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훈민정음 제자 원리의 철학적 배경에 대해서는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못하였다.(이성구, <훈민정음연구>, 동문사, 1985, 26쪽).
최현배도 그의 저서 <고친 한글갈>(1961)에서 신경준이 <훈민정음> 원본을 보지 못한 채 자신의 주장을 그릇되게 펼쳤다고 지적하였다.(최현배, <고친 한글갈>, 정음문화사, 1982, 624, 625쪽).
1940년 간송 전형필 선생이 입수한 원본 <훈민정음>은 경북 안동시 와룡면 진성이씨 이한걸 집안의 가보였다. 퇴계 이황의 종파(宗派)이며, 일찍이 먼 조상이 여진 정벌의 공이 있어 세종대왕으로부터 <훈민정음> 1권을 상으로 받아 가보로 전해 오다가 연산군 때 언문책 소지자를 엄벌할 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부득이 첫머리 두 장을 뜯어 버리고 돌돌 말아서 상자에 넣어 비밀리에 보관해 오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440여 년만에 원본 <훈민정음>인 해례본이 다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전형필 선생이 조선어학회에 원본을 공개하여 광복 후 1946년에 조선어학회에서 영인본을 발간하였다.
세종대왕이 직접 지은 예의(서문 포함)는 전해졌지만 한글의 창제원리가 적힌 ‘해례’의 존재를 몰랐다가 이 해례본이 출현함으로써 모든 궁금증이 사라졌다.
― 김슬옹,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역사와 평가」, <한말연구> 37, 한말연구학회, 2015.
<훈민정음>은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훈민정음>을 국보 제1호로 지정하자는 움직임도 있다.
참고로,
현재 우리나라 대다수 작명가와 모든 작명앱, 작명프로그램들은 이러한 원본 <훈민정음>의 내용과 전혀 다르게 토(土)인 입술소리(순음) ㅁㅂㅍ을 오행상 수(水)로, 수(水)인 목구멍소리(후음) ㅇㅎ을 토(土)로 잘못 사용하면서 1750년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 내용을 따랐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무지한 핑계일 뿐이고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일본의 작명가 구마사키 겐오(熊﨑健翁)가 1929년에 펴낸 <성명의 신비(姓名の神祕)>에서, 일본의 문자 히라가나, 가타카나를 오성(五性)으로 각각 분류하면서 아(阿)행과 와(和)행, 야(也)행은 토(土)성으로, 파(波)행과 마(麻)행은 수(水)성으로 분류하였다. 이것이 1940년 2월부터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시행한 일제 창씨개명(創氏改名) 시기에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전파되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매일신보』1940년 2월 26일자 광고
당시 영문을 모르는 조선의 작명가들이 부화뇌동하면서 현재 우리의 한글 자음(子音)에도 그대로 가져와서 지금까지도 그릇되게 잘못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글 자음 분류 비교